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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92년 조선은 임진왜란이란 기습을 당하였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짐작은 했지만 대비가 약해 官軍은 무너졌다. 義兵이 일어나고 이순신의 水軍이 호남을 지켜내는 사이에 明軍이 들어와 조선을 구하였다. 2. 그 35년 뒤인 1627년 누루하치의 後金이 조선을 치는 정묘胡亂이 일어났다. 仁祖는 대책 없이 강경책을 펴다가 기습을 허용하였다. 일어나는 後金과 스러지는 明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대주의 외교정책을 쓴 탓이었다. 실용정책을 쓴 광해군을 明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몰아낸 결과였다. 3. 그 9년 뒤 淸(後金)태종은 다시 조선을 치는 병자胡亂을 일으켰다. 정묘胡亂을 당하고도 망해가는 明에 충성을 바치는 외교를 하다가 전쟁을 부른 것이다. 仁祖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수십 만 명의 여성들이 끌려갔다. 4. 淸이 중국을 정복, 明을 멸망시킨 뒤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전히 明을 중국의 정통으로 여기는 病的 분위기를 만들고 폐쇄의 길을 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西勢東漸의 천하대세에서 멀어져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5. 建國 직후 김일성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 김구, 김규식, 많은 국회의원들과 지식인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요청하였다. 일부 세력은 공산군이 남침하면 한국이 버틸 수 없다고 예견하고 투항주의적 자세를 취하였다. 6.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親美派는 李承晩을 대통령職에서 몰아내고 장면을 내세우려는 공작을 추진하다가 戰時下 임시수도 부산을 政爭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결국 이승만의 역습을 받아 실패하였다. 7. 4.19로 이승만이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이 사회혼란을 부채질하여 군사혁명을 불러들였다. 8. 10.26 사건 이후 3金씨는 대통령 자리를 목전에 두고 경쟁하는 사이에 경제위기, 사회불안이 증폭되었다. 이는 全斗煥의 신군부가 집권하는 길을 열었다. 8-1. 김영삼은 북한이 核위기를 일으키고 미국이 군사적 대응까지 고려하자 미국의 발목을 잡아 강경책을 쓰지 못하게 하곤, 국내적으로는 좌파宿主 정책으로 보수세력을 분열시켰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核위기를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9. 2006년 김정일이 核실험을 하자 노무현-김대중 좌파세력은 韓美연합사 해체를 결정하고 對北제재에 불참하는 등 利敵행위를 하였다. 10. 2009년 북한이 두번째 核실험을 하자 김대중, 민노당, 민주당과 좌경세력은 李明博 정부의 자위적 대응을 비난하고 사실상 북한정권 편을 들었다. 이처럼 한국의 소위 文民세력은 국가위기 때마다 분열하고 誤判하여 재앙을 불러들였다.
그 원인은 대충 이러하다. 1. 내부의 경쟁자를 외부의 敵보다 더 미워한다. 彼我식별 기능이 마비되었다. 2. 평화, 事大 등 명분론의 포로가 되었다. 3. 국제정세를 착각하였다. 4. 군사와 전략에 대하여 無知하였다. 5. 과거의 실패 사례를 분석, 반성하는 과정과 생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軍人들과 大전략가는 위기에 잘 대비하였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이승만은 韓美동맹으로 북한의 再남침에, 박정희는 자주국방력 건설로써 김일성의 모험노선에, 전두환-노태우는 서울올림픽과 북방정책과 韓美동맹 강화로 전환기의 한반도 정세에 잘 대비하였다. 李明博 대통령은 韓美동맹 강화, 韓日우호 관계 강화, 對北실용정책으로 잘 대비하고 있다. 문민중에선 특이한 존재이다. 이는 그가 기업인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國政운영에 기업인이 정상배 출신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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