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경 여 행
2008년 9월12일 오후 5시경, 중화동에서 인천국제 공항리므진버스를 타고 가슴을 조아리면서 1시간 50분만에 도착한 시간이다.
공항 좌측 끝지점 ( A )에서 " 하나투어 "직원을 만나 주의사항을 듣는다. 하나투어 여행사직원은 여행객 이름들을 호명하면서 하나씩 여권을 돌려주고나서 여권표지에 번호가 적혀 있는 스티커를 확인 하라고 말한다.
마누라는 5번 나는 6번이다. 인솔자가 없으므로 단체여행 출입국비자를 1번 여행객이 간직 하였다가 출입국때에 제일 먼저 이 비자쪽지를 제출하고 여권표의 순번대로 출입국 수속을 받은후 맨 나중 끝번호가 이 비자용지를 꼭 받어야 한 다고 누누히 강조한다.
앞번호 와 뒷번호 여행자가 싱겁게 그 뜻을 알아 챈다. 요즘 여행자의 여행상식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탑승시간은 오후 7시, 아직도 시간반이 남는다. 면세점을 기웃거리면서 손녀선물을 찾아본다. 4년전만해도 면세점에 들
르면 의례껏 담배코너부터 찾았었다.
여행 내내 줄담배를 피워 뎃으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격이었다. 이제는 담배마져 끊어서 면세점을 기웃거릴 일 조차 없게 되었다. 여기저기 기웃 거리다가 전자코너에서 발을 멈추었다.일년전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디카를 구입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구형케논이 선호도가 1위인 것을 알고 그 모델을 기입하고 테크노마트 전자코너를 찾아갔었다. 점원은 신형은 있는데 구형은 단종되어 품절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구매가 불가하다하기에 대신 산 것이 현재 내가 쓰고 있는 " 카시오 "디카이다. 모니터가 큰 것에 비해 디카가 작아서 휴대하기에 매우 편하다는 점이 매력포인트였다. 그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매우 만족하고있다. 그런데, 디카를 구매하고 집에와서 확인 해보니 악세사리로 산 밧데리가 정품이 아니고 중국제품이 었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 무언가 속았다는 느낌을 져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일주일후 롯대면세점에서 단종되었다는 케논디카가 날개돋힌듯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인터넷에서 경고한 구절중 " 맨처음부터 구매는 절대금물이다. 다시 한번 생각 하고 구매하라 ! 악세사리는 꼭 정품인지 확인하라 !"는 충고가 뒤늦게 생각났다. 진열장 위에 구형케논디카는 그당시 가격이 약 30%정도 떨어지고 신형이 그사이 여러개가 진열 되어 있었다. 전자제품이 발전은 가히 눈부실정도였다.
다시 구매 하려던 충동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사면 일년후 이 보다 더 좋은 신형이 다시 만들어져 나올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실재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사진을 찍었을 때 화상의 정밀도가 어느정도인가하는 점이다. 그래서 추후에 취미가 발전되면 전문 카메라를 구매하리라 하고 홀가분하게 마음 먹고 이 헤프닝을 떨쳐 버렸다.
KAL비행기는 30분이나 늦게 출발 하였다. 기내 승객들은 거의 한국관광객들로 꽉 차 있었다.
관광지 어디에선가 서로 다시만나고 돌아 올때도 다시 이 기내에서 만날 것이다. 2시간 남짓 소요 한 후 비행기 창문으로 본 북경의 야경은 매
우 어두어 보였다. 북경수도공항도 어둠속에서 비교적 커 보였다. 대충 현지시각 20시30분에 기내 밖으로 나와서 입국심사장에 도착하고 비자순서대로 정렬하여 입국장을 통과 하였다.
이 입국수속장을 막 통과하고나면 공항실내 벽면에 길다랗게 만리장성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림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북경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선정 한 것임에 틀림없다. 공항청사는 한적하고 내부는 올림픽을 치르면서 새롭게 단장된 모습들이 보이고 세련 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깨끗 하였다.
짐찾고 밖으로 나오자 현지 가이드들이 피켓을 들고 고객들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가이드는 해바라기 하나투어 깃발을 들고 서 있는 통통하고 작달막한 젊은 여성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북경땅을 처음 밟으면서 느껴보는 인상은 별스러운 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대국적이거나,사회주의적이거나,초현대적인 모습이 그렇다. 관광버스로 이동하
면서 대충 여행자들이 부류가 젊은부부,남자형제,여성직장친구, 집안식구,아이들등으로 구분되고 최고 연장 80노모를 제하면 내가 제일 나이먹은 축에 들었다. 나는 이들이 여행에 다소나마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행동을 민첩하게 움지이자고 다짐 하였다. 광광버스가 공항을 벗어나면서 현지가이드는 마이크를 잡고 현지가이드 최명숙이라고 본인을 소개하고 여러분들은 여기에 오셔서 한시간 젊어지셨다고 [ 시각차이 ] 죠크한다. 단체인원은 모두 23명으로 확인되었다.
날씨는 서울과 비숫하고 내일은 흐리기는 하나 비는 오지않는 다고 한다.
관광코스는 교통체중에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숙소는 북경시내 변두리에 있으며 사성급호텔 ( CITY INN BEIJING HAPPY VALLEY 화교성 주점 ), 관광이 끝날 때까지 숙박한다는 것, 북경은 빈부차이가 심하여 호텔도 특급호텔은 입이 벌어 질 정도로 비싸다고한다.
중국총인구가 약 13억, 그중 약1억이 부유층에 속한다고 하니 부자가 한국 총인구 수보다 더 많은
나라이다. 땅 덩어리는 남한면적의 100배에 달하고 56개의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고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펴고 있다한다.
성격들은 만만디, 매우느린 편이며 서비스개념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 예를들면 식당에서 손님이 수저나 컵이 없다고 할 때 종업원이 귀찮으면 무시 해 버리는 습성이다. 여러번 얘기 해야만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허술해 보이는 식당도 수저나 컵을 요구하면 칼날같이 대령한다. 가이드는 중국지도위에 여러자치구와 성,주요도시가 적혀진 쪽지를 나누어주고 중국의 행정구역을 대충 설명한다. 요약 하자면, 4개의 직할시는 1. 북경, 2. 천진, 3. 상해, 4. 중경, 이고 5개의 자치구는 1. 내몽고 자치구, 2. 신강위구르자치구, 3. 서장자치구, 4. 광서장족자치구, 5. 여하회족자치구가 있다. 그외 2개의 특별자치구는 홍콩,마카오이다. 성은 모두 22개이며 구역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1. 화북구는 하북성 과 산서성.
2. 서북구는 섬서성,감숙성,청해성.
3. 동북구는 요뇽성, 길림성, 흑룡강성.
4. 화동구는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강서성,
복건성, 산동선.
5. 중남구는 하남성,호북성,호남성,광동성,해남성
6. 서남구는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국명은 " 중화인민공화국 ( 中華人民共和國 ) "
국기는 오성홍기 ; 붉은바탕에 왼쪽 윗부분에 황색으로된 큰 별 하나로 4개의 작은 별이 둘러 싸고있는 도안. 뜻은 큰별은 중국공산당을, 4개의 작은 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4개의 인민계급, 즉 노동자,농민,도시소자산,민족자산의 계급을 상징한다.
수도는 북경 ( 北 京, 베이징 )
중국 총 면적은 960만 km''이며 러시아 - 캐나다 -중국 순으로 3위이다. 한반도의 44배.
인구는 약 12억9천만명 ( 2004년 1 기준 ), 산아제한으로 한족 ( 漢族 )에 한 해 1가구 1자녀 정책을 펴고 있다. 허나 부작용으로 농촌지역에서는
호적에 오르지 못한 아이들이 증가하여 감춰진 아이라는 흑해자 ( 黑孩子 ,헤이하이즈 )들이 생겼다. 그 중에서도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주로 여자 아이들이 흑해자가 되어 족보가 없는, 행정상 기록이 없는 무존재 여아의 피해가 커지고 있으며 반면에 가정마다 1자녀 정책으로 소황제 ( 小皇帝 )라 하여 외동딸,외동아들을 황제처럼 모시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이런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중국인구가 15억이 넘을 것으로 추정 한다고 하니 지구를 뻥튀기 하든가 무슨 수를 써야 겠다.
민족은 모두 56개 민족, 주로 한족 ( 漢族 94% )이며,그외 장족, 회족, 묘족, 만주족, 조선족 등 55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조선족은 약200만명으로 주로 연변 조선족자치구에 살고 있다.
중국은 안정된 통일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민족을 평등이념으로 보고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일환으로 소수민족의 지역자치를 시행하게 하고, 민족고유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이 언어와 문자사용을 권장하고, 그들이 종교적자유를 보장 해 주면서 좋은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허나 최근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자치구 내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사태가 있었고 중국의 무차별 진압과정을 보면서 언젠가는 소련연방이 무너졌든 전례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숨길수 없다.
정치는 지도자로써 국가주석겸 당 총서기,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 후진타오 " ( Hu Jin Tao )와 국무총리 " 원자바오 ".
정부형태는 공산당 일당독재. 의회는 단원제, 정치체제는 노농연맹에 기초한 인민 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중국의 공휴일 ; 법정휴일 3일.
1. 양력 1월1일 ; 신정 ( 元旦, 위엔단 )
2. 음력 1월1일 ; 구정 ( 春節, 추지애 )
3. 양력 5월1일 ; 국제노동절 ( 라오동지에 )
4. 양력 10월1일 ; 국경일 ( 궈칭지에 )
법정휴일은 3일이지만 휴일을 주말로 대체하여 보통 7-10일 정도 쉰다. 대국이라 고향을 찾아가는 시간이 길기때문이다. 그외 반 공휴일, 민속명절이 있다.
관광버스는 저녁 9시30분즈음 북경중심을 지나 어느 한적한 곳에 도착하고 City Inn 호텔간판이 보이는 곳으로 여정을 풀었다. 한국과 비교하면 콘도정도 일성십다. 각 방마다 음료수로 생수두병이 전부이고 냉장고속은 텅비어 있었다.
휴지는 절반을 사용한 두루마리 한개가 있고 북경에서는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므로 아침에 나올 때는 이 휴지를 갖고 나오라고 가이드가 조언 했었다. 아침 일찍 간단히 차려진 부폐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특히 쥬스와 우유맛이 민밋하여 이상하였다.
아침 8시,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서둘러 관광지로 출발하였다. 남보다 한발 앞서면 관광지마다 번잡하지 않고 관광할 수 있다는 가이드의 지론이다. 차창너머로 북경올림픽 메인스터
다움이 보이고 올림픽 성화 모양의 체육회관 건축물이 보인다. 2008년 북경하계올림픽 최종 메달순위를 보면 1위 중국 ( 금 51 )- 2위 미국 ( 36 )- 3위 러시아 ( 23 )- 4위 영국 ( 19 ) - 5위 독일 ( 16 )- 6위 오스트레일리아 ( 14) - 7위 한국 ( 13 )- 8위 일본 (9 )- 9위 이탈리아 ( 8 )- 10위 프랑스 ( 7 )이다.
우리나라가 매우 선전 하였고 왠지 일본보다 앞선 것이 독도문제로 기분풀이 한 것같아 기분이 좋고 야구가 전승으로 통쾌하게 우승한 것이 또한 즐겁고 유도에서 줄곧 한판메치기승부로 통쾌하게 이겨 처음으로 금메달을 안겨준 최민호가 자랑스럽고 미국의 텃밭인 수영종목 ( 자유형400m )에서 박태환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장면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외 금메달리스트를 보면 여자양궁단체전에 주현정, 윤옥희, 박성현과 남자 양궁단체전에 박경모, 이창환, 임동혁 그리고 사격 ( 남자 50m권총 )에 진종오, 베드민턴 혼합복식에 이효정,
이용대, 태권도에서 체급별로 4명 즉 개인 80kg 이상급에 차동민, 여자개인 67kg급에 황경선, 남자 68kg급에 손태진, 여자개인 57kg급에 임수정, 역도에서는 체급별로 여자개인 75kg초과급에 장미란, 남자개인 77kg급에 사재혁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건아들이기에 이들이 흘린땀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로하자.
올림픽은 세계적인 스포츠행사 임에는 틀림이 없다. 각나라마다 금메달에 열광하고 있으며 전 세계인을 텔레비젼 앞에 않혀놓고 응원을 아끼지 않게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메달숫자만으로 스포츠 강국임을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일례로 다음 올림픽 개최지는 잉글렌드의 런던올림픽인데 벌써 야구와 소프트볼은 없애버리고 ( 2006년 6월 싱가포르 IOC총회에서 결정 ) 이름도 생소한 크리켓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올림픽은 주최하는 국가에서 임의적으로 몇가지 종목을 추가하는 관례로 일종이 개최국의 프리미엄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양궁이 확정되고 태권도가 임시종목
으로 채택되어 금메달박스를 만든 예이다. 각나라의 이해관계로 지금은 태권도도 탈락위기에 처 해있다. 잉글랜드는 세계적으로는 잘 알려지지않은 럭비, 크리켓, 폴로, 스누커 ( 7색볼을 바스켁에 넣는 당구 )경기에 열광하며 영연방국가에서 일부하는 이런 경기를 올림픽종목으로 채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켓은 야구와 비슷하나 빨래방망이처럼 생긴 넙적한 배트로 친다. 원래 야구의 기원은 이 크리켓이었다. 영국인들이 야구를 경시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전통 크리켓을 모방하고, 정정당당해야 할 스포츠에서 신사답지 못하게 눈치나보며 도둑질(도루)이나 하는 게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야구는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채택되어 6년만에 4번경기를 하고 막을 내리는 셈이다. 사실 야구는 親美國家 들인 한국,미국,일본,대만 과 큐바에서만 폭발적인 인기가 있을 뿐이다. 그외 북미,중남미,오세아니아,동남아,몇개의 유럽이 있기는하다.전세계적으로 2백여팀이 치열하게 예선을 치르고 겨우 16개팀이 엄선되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축구에 비하
면 이번 북경올림픽에서의 야구는 단 7개국나라만 참가 했다는 점으로 볼 때 분면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야구를 탈락시킨 정식이유는 첫째 정해진 종료시간이 없고 3-4시간이 소요되어 흥미가 없으며 TV중계가 어렵다는 점, 둘째가 미국문화에 영향을 받은 극소수 국가만 인기가 있고 세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뒷소문으로는 IOC가 미국의 메이저리그를 참여시켜 중계권료를 올리려하고 메이저리그는 소속팀 주전멤버를 안
뺏기려는 두 단체간의 갈등이 한 �을 했다고 보고 있다. 여하튼 원칙으로 돌아가서 "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기 위해서는 75개국 4개 대륙에서 남성에 의해 널리 시행되고 있고, 동시에 최소한 40개국 3개대륙에서 여성에의해 널리 실시되고 있는 종목이어야 한다. " 라고 규정 되어있다. 과연 야구나 크라켓이 이 규정에 합당한 것인지 부터 생각 해 봐야겠다.
명 십 삼 릉
북경시내에서 약 한시간을 달려 명13릉(明十三
< 무자비 ( 無字碑 ) 비석에 글이없다. 공적이 없거나,후세의 판단에 맡긴다 ? > 陵 )이라는 관광지에 도착하였다. 비가 올 � 우
중충 한 날씨이다. 도착지 주변 가장자리에는 간이 상가가 즐비하게 있고 주로 과일을 팔고 있었다. 돌다리를 건너자 거북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에는 글이 적혀있지 않다. 가이드는 이를 무자비라 하며 이유는 이 황제의 평가를 후세에게 맡긴다라는 뜻과 공덕이나 치적이 없어서 적지 않았다라는 두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워낙 주색에 빠져 국정은 돌보지 않고 탐관오리만 좋아했던 황제였으니 무자비가 그럴싸하다. 추후에 얘기하기로하고, 좀더 지나자 넓은 곳이 나오고 정식 출입문이 있는 동대문같은 기와집이 보인다. 양옆에는 꽃으로 장식한 북경올림픽 표어가 적혀있다. " 同 一介世界 ( onE WORLD ) ", " 同一介夢想 ( onE DREAM )".
정문입구에는 " 정릉박물관 " " 명13릉"이라고 적혀있다.
북경 창평구 천수산에 둘러쌓여 명나라 황제,황후의 능묘들이 안치되어 있는곳, 성조 영락제 이후의 명나라 황제13대의 능묘가 안치되어 명13릉이라 불리고 있는 이곳,우리나라가 얼마나 받들
어 모셨든 분들인가 !.
명13릉은 난징의 명효릉과 함깨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명13릉중에 " 정릉" 이 발굴되어 내부지하궁전이 공개되면서 관광코스가 된 것이다.
원래 명나라 황제는 16제가 뭍혀 있는데 베이징의 명13릉은 13개의 능묘만 있다. 나머지 3개의능묘는 어디에 있는가 ?. 추적해 보면 첫째, 명나라 개국 황제인 주원장은 도읍을 난징에 건설하고 사후에 난징의 종산에 있는 명효릉 ( 明孝陵 )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
둘째, 주원장의 황제자리를 계승한 장손인 건문제 주윤문은 삼촌인 연왕 ( 燕王 ) 주체가 정난( 靖亂 )지변을 일으켜, 그 당시 전시에 끝내 행방불명이 되어 능묘가 없다는 것. 세째,대종 경태제 ( 景泰帝 ) 주기옥도 황제였으나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아 경태릉 ( 景泰陵 )으로 불리고 현재 베이징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 황제들 (제1대 - 제17대 )과 明十三陵 의 피장자 를 보면 ;
1대.태조 홍무제 주원장-명효릉(明孝陵)1368
2대.건문제 주윤문 ( 1398 - 1402 )
3대.성조 영락제 주체- 장릉(長陵)1402
4대.인종 홍희제 주고치- 헌릉 ( 獻 陵 )1424
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경릉 ( 景 陵 )1425
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유릉 ( 裕 陵 )1435
7대. 대종 경태제 주기옥-경태릉(景泰陵)1449
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1457-1464
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무릉 ( 茂 陵 )1464
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태릉 ( 泰 陵 )1487
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강릉 ( 康 陵 )1505
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영릉 ( 永 陵 )1521
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소릉 ( 昭 陵 )1566
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정릉 ( 定 陵 )1572
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경릉 ( 慶 陵 )1620
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덕릉 ( 德 陵 )1620
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사릉 ( 思 陵 )1627-1644 = 명나라 ( 1368 -1644 ) =
1,2,7,8대를 제외한 나머지 13명의 陵[명십삼릉]
지금부터 명나라 황제들의 종적을 추적하면서 명나라의 흥망성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하자.
- 제1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明나라는 테무진 징기스칸에 의해 세워진 원나라를 내 쫏고 ,중국 양자강하류의 南京에서 1368년 주원장 ( 朱元璋 )에 의해 건국 되었다.
31년간 재위하고 향년 71세로 병사하였다. 명나라는 모두 300년을 유지 하였다.
주원장은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동쪽사람 ( 濠洲鐘離 )인 빈농출신으로 지주집에서 목동으로 소년시절을 보내고 16세 (1344)에 가뭄과 질병으로 민심이 흉흉한 시기에 부모를 잃고 황각사 ( 皇覺寺 )에 들어가 잡일을 하면서 �혀 살았다. 그후 떠돌이 중이되어 회서 지방을 떠돌다가 우연히 봉기군(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원나라 말기에 元황제,순제는 타락한 라마교에 사치와 향락을 즐겼으며 고위급관리들은 몽고족이 모두
차지 하였고 한족은 신분차별로 출세의 길을 막고 무기소지도 못 하게 하는등 폭정으로 일관하여 한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하였다. 그런 때에 가뜩이나 중부와 북부지방에서 가뭄이 심하게 닥쳐 땅이 갈라지고 농사가 말라 비틀어지는데 메뚜기떼를만나 더욱 기근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 당시 700만명이상 굶어죽고,서구에서 들어온 페스트 괴질등으로 인하여 민심이 최악에 달하자 한족들은 도적때와 비적이 되어 탐관오리의 집을털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 ( 紅巾軍 ) 의 원나라에 대항하여 여기 저기서 봉기을 일으키는 사태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1351년 백련교도가 홍건적의난을 일으킴- 이때 1352년에 주원장은 호주 ( 濠州 ) 곽지흥(군웅중 하나)의 봉기군에 들어가 지혜와 용맹성을 보이자 곽지흥은 자신의 오른팔이라 생각하여 직속 호위병으로 발탁하고 그후 여러 승전과 공적이 있자 양딸 마씨 ( 馬氏 )마져 베필로 주었다.
곽지흥이 죽자 주원장은 군웅(軍雄)이되어 군세력을 더욱 확장한후 남방( 남경 )으로 진격하여 1356년에는 한림아 ( 韓林兒 )의 송(宋)정권으로 부터 좌부원수 ( 左副元帥 )가 되었다. 그해, 집경 (集慶)을 점령하여 응천부라 개명하고-지금의 강소성 南京市- 宋으로부터 강남행성평장 ( 江南行省平章 )을 얻은후 자칭 吳國公이라고 하였다.
그후 곧 진우량 (陳友諒)을 격퇴하고 이제는 오왕 ( 吳王 )이라고 칭했다. 그런후 또 장사성 ( 張士誠 )을 제거하고 한림아를 죽인 후 중원정벌에 나섯다. 주원장이 군생활 16년만에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고 1368년 정월 초나흘 응천 ( 應天 )봉천전 ( 奉天殿 )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명 ( 大明 ),연호를 ' 홍무 (洪武)' 라 칭하고 응천을 수도로 하여 명나라를 건설하였다 그해 8월 (1368) 다시 북벌에 나섰고 원나라의 순제 ( 토곤 티므르 )는 수도인 대도 (大都, =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치다 죽었다. 이로써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명나라에 의해 명실상부,漢族의 나라, 중국이
통일 되었다. 주원장은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하여 농업정책을 중시하여 인구조사 및 농촌의 토지측량,저수지 등 수리사업,세금감면을 실시하여 농업생산이 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내정의 안정되고 부강하기 시작하였다.
조정은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하는 중앙집권식 독제체제를 만들어 자식들을 번왕 ( 蕃王 ; 지방 왕 )에 봉한뒤 각처에 분산시켜 집권하게 하였다. 허나 건국초기의 일등공신이나 문무백관들에게는 야박하게도 무차별 살상하였다. 많은 검교 (檢校)을 파견하여 백관들의 언행들을 감시 감독하였는데 자신의 과거가 천민한 자격지심 때문인지, 의심이 많은 성격 탓인지 알 수가없다. 황제 30년에 공신 3만명이상을 죽였으니 말이다. 상소문에 광(光)자가 있으면 자신의 어릴때 중이 었다고 -당시 광자는 중을 의미-깔보는 것으로 착각하여 죽이고, 검교의 고자질로 엄청히 죽였다. 죽이는 것도 역대제왕중에 가장 참혹하게 죽였다. 예로 호유용 ( 胡維庸 )과 남옥 ( 藍玉 )사건이다. 좌승상 호유용은 권력남용과 역모죄로 그와 연류된 1만명을 모두 죽여버렸다.그리고 그지역 중서성(中書省)을 아예 폐지하고 다시는 승상을 두지않고 직접 관리 하였다. 양국공(凉國公)벼슬 남옥은 공적이 높은 장수였는데 금의위 (金衣衛)관리가 그를 모반죄로 밀고하여 그와 연루된 만오천명의 용맹한 장수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주원장은 법을 위반한 관리들에게도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 예로 김화 ( 金華 )지역을 공격 할 때 식량이 부족하여 금주령을 내렸다. 그런데 대장군 호대해 ( 胡大海 )의 아들이 몰래 술을 빚어 금주령을 위반했다. 호대해는 소흥(紹興)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대신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대해가 반발하더라도 법에
< 만력황제의 유골 >
따라 처형하라 명령하고 직접 칼을 뽑아 호대해의 아들을 죽여 버렸다.
형벌도 매우 잔혹하였다. 일반적인 참수,족주 (族誅 ; 가문 몰살 ), 추장 (抽腸 ; 창자꺼내기), 박피 ( 피부벗기기), 알슬개 ( 무릎 후벼파기), 잡사 ( 압사시키기)등으로 처형하고 관청 정문앞에 가죽을 벗겨 허수아비에 씌워 놓았다. 관청내 관리들은 물론 문무백관들은 극도의 공포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으며 출근 할 때마다 가족들에게 후일을 부탁하였다. 조회때 주원장이 옥대를 배아래로 내려놓으면 그것은 오늘 사람을 많이 죽이겠다는 신호이고, 옥대를 가슴앞에 두면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겠다는 신호였다한다.
문인(文人)들도 자신의 통치에 불만의 글을 쓴다하여 문자옥(文字獄)이란 죄목을 만들었다. 예로, 절강부학교수인 임원량(林元亮)이 대필로 사은표(謝恩表)를 지어주면서 '作 則 垂 憲'이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則"이 그를 "賊"으로 욕한 것으로 해석하고, 또 상주부학훈도 장진이 하표 ( 賀表 ; 조정경사에 신하가 왕실에 올리는 축하의 글 )를 쓰면서 "睿 性 生 知 (예성생지)"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生"자를 "僧"로 알고 자신을 과거에 중이었다고 욕한것으로 또한 잘못해석하여 임원량과 장진을사형에 처 해버렸다.
형부주사( 刑部主事 ) 여태소가 만자에 이르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6370자 까지 읽어도 건의내용이 안나오자 화가난 주원장은 여태소를 불러 매질을 가하게 했다.
주원장은 자식들에 대하여는 유능한 학자,이선장,유기,주승을 초빙하여 학문과 인성공부를 엄격하게 시켰으며 오왕(吳王)에 올랐을 때 이미 장자 주표(朱標)를 세자로 책봉했고, 그후 황제가 된 후에는 그를 태자로 책봉하면서 항상 인자함(仁),현명함(明),근면함(勤),결단성(斷)을 갖추
< 발굴당시 지하궁전으로 통하는 입구 벽 >
어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태자 주표는 성격이 샌님처럼 얌전하고 온순하여 주원장이 공신을 죽일때마다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한번은 주표가 폐하께서 사람을 너무 함부로 죽이시니 감정을 상하게하실까 걱정된다고 하자 다음날 주원장은 가시나무 막대기를 땅에 던져놓고 주표에게 주워오라고 명 하였다. 머뭇거리고 있는 주표에게 주원장은 "네가 가시를 무서워하니 내가 가시를 뽑아 너에게 다시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라고 하자 주표는 " 위로는 요임금과 순임금같은 어진 임금이 계시고 아래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백성같은 훌륭한 백성들이 있읍니다 "라고 하였다. 주표가 우울증으로 일찍죽자 주원장은 말년에 고열과 악몽에 시달리면서 병약해지고,건강에 자신을 잃자 주표의 장자이면서 자신에게는 손자인 주윤문 ( 朱允紋,16세 )을 태손으로 책봉하고 그후 어린 태손의 노장과 중신들에게 제압당할까 걱정되어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몇 안되는 공신마져 모두 죽여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번왕으로 있는 자기 아들들이 이 손자를 상대로 황위쟁탈전을 벌일까 두려워 < 영감록 (永鑑錄) >과 <황명조훈(皇明祖訓)>을 편찬하여 자손들에게 종법제를 준수하도록강요하고 만일 이 제도를 고치는 자가 있으면 간신으로 간주하여 때려죽여도 무방하다고 규정하기 까지 하였다. - 그러나 결국 주원장의 아들 이며 주윤문의 삼촌인 연왕 주체에게 황제자리를 뺐기고 만다. -
1398년 윤5월 주원장은 " 위기에대한 근심걱정으로 하루도 게으름을 피지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라는 유언과 " 내 아들 번왕들은 상레를 치르러 경성에 오지말고 각자의 영지를 지켜라 !"하여 어린손자를 끝까지 보호하여 주씨왕조가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기대하면서 경성의 서궁(西宮)에서
< 자동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문 >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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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박물관 으로 입장을 하고 계단을지나 좌측 정원을 보면 작은 전시관 건물이 있다. 발굴당시의 사진들이 건물벽에 전시되어 있고 황제의 초상화와 옷과 왕관과 유품의 약간 있었다.
당시 지하궁전에서 출토된 3000여 문화재중에는 제후들이 사용하였던 일용기물과 복식이 많았다. 금관과 봉관을 보면 제일 무거운 봉관은 무게가 2,905gr에 달하고 5,449개의 진주와 128개의 보석이 박혀져있다. 그 외에도,정교한 금술주전자, 옥잔,옥사발,청화자기,삼채자기화로 등 당시 최고 공예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당시 여러차레 입구를 찾지 못하여 헤메다가
겨우 입구문을 찾았는데 그 높이가 5m, 폭이 3-5m, 두깨가 약30cm로 육중한 돌로된 문이 양쪽으로 되어 있고 바깥에서 열 수가 없도록 무덤 안쪽에 자동잠금장치가 되어있었다. 이를 철봉으로 만든 구브러진 열쇠로 돌린후 앞으로 밀어서 문뒤에서 받치고 있는 돌로된 쐐기를 뒷쪽으로
민후 문을 옆으로 밀어서 열었는데 처음에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화살이나 독가스가 있는 줄 알고 발굴대원들이 조심하느라 방독면까지 착용 했다고 한다.
1956년 중국 고고학자들이 명나라 말년 황제인 만력제 주익균의 능묘인 정능 지하궁전을 발견하고 1959년 10월 정릉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발굴은 저우언라이 ( 周恩來 )총리가 지휘하고 중국의 대표적 지성 꺼모뤄 ( 郭洙若 곽수약 )가 현장 감독하였다.
지하궁전은 총 18만 m'''이고 땅 밑으로는 지하4층까지 27m깊이에 있고 전,중,후의 삼전으로 나눠져 있다. 전전은 사무보는 구역이고 중전은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침실이며 후전은 황제,황후의 침실로 황제 주익균과 효단,효정 두 황후의 관재가 놓여져 있다. 관곽양쪽에 주철나무상자- 그 속에 부장품 이 있음-26개가 놓여 있고 그 주위에 옥기,자기병이 놓여 있었다. 옛 황제들은 한 황후만을 자기옆에 뭍었는데 주익균
은 황후 둘다 자기옆에 모셨다. 지하궁전은 벽돌과 돌로 건조된 아치형 건축물이며 묘실은 5개,즉 前, 中, 後, 左, 右의 크고 넓은 전당 (殿堂)으로 연결되어있다. 중전 (中殿) 에는 한백옥 (漢白玉)으로 조각한 3개의 보좌 (寶座)가 일렬로 놓여있고 좌전 (左殿) 과 우전 (右殿)에는 관을 놓는 침상만 있고 관은 없으며, 후전 (後殿) 에는 만력황제와 효단황후 (孝端皇后), 효정황후 (孝情皇后)의 모형관이 있다. 건조된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우 견고하다. 황제들은 만19세가 되면 자기의 무덤을 선택하고 건설하는데 만력제 주익균은 22세에 시작하여 28세까지 건축하였다. [ 神宗 13년 (1585) -18년(1590) ].이 공사를 하면서 은 800만양이 소모되고,연 인원이 6,500만명, 하루 3만명의 노동자가 동원 되었다. 그당시 매 가구당 6.5명분의 노동력을 바친셈이 된다고한다. 이를 쌀로 환산하면 100만명이 6년반동안 먹을 수있는 양이라고 하니 년간 재정수입이 은400만양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때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짐작하면 나라가 망 할만도 했다.
<황후가 죽으면 황제와함께 합장하기위해 만들어 놓은 통로. 처음에는 지하궁전이 입구로 착각 >
이왕 말이 나왔으니 순서가 바뀌어도 만력황제에 대하여 먼저 애기하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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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
神宗 萬歷皇帝 주익균( 朱翊鈞 1563 - 1620 )은 목종(穆宗) 융경제의 3남으로 태어나 부친이 병사하여 황위를 계승받은지,1572 - 1620년 까지 48년간, 명나라 역대 황제중 통치기간이 가장 긴 재위를 하고 향연 58세로 병사하였다.
그는 겨우 10세의 어린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의 스승인 장거정 (張居正)과 고공(高拱),고의(高儀)등이 정무를 보좌 하였다.
특히 재상 장거정은 교육방식이 너무 엄격한 오렌 스승일 뿐만아니라 정무도 열심히 하여 유능한 대신들을 선발하고 위계질서,기강확립,군비증강 등을 하여 " 철혈재상"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리고 사심없이 단호히 국사일을 처리하고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일조편법"이란 세법을
추진하고 황하치수사업을 잘 진행하여 정국을 안정시켜 나갔다. 어린 신종이 재위 10년째 되는해 그런 장거정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까지 조용하던 반대세력들이 서서히 장거정이 비리를 들추면서 공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신종은 처음에는 장거정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다가 그의 재산이 자기보다 많은 것을 알고 부터는 장거정이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버렸다. 신종은 물욕이 매우 강하여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일이든 하였다. 이를 안 고관과 환관들은 탐관오리가 되어 황제에게 아부하면서 재상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국고는 줄어드는데 황제의 재산은 늘어만 갔다. 국정을 돌봐주던 장거정이가 죽자 신종은 직접 국사일에 관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만사를 귀찮아 하면서 조회에도 거의 참석하지도 않았다. 재상도 만나주지않고 대신들이 올린 많은 상소문들도 거들떠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주요한 관직임명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당시 고위직은 직접 황제가 임명하여야만 했으므로 정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든 만력재 보좌(寶座)>이렇게 큰 백옥돌로 ......
부의 많은 관직들이 빈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만력 14년 (1586)부터는 결국 황궁내에서만 살
면서 30년간 조정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만력 34년 (1606)에 비어있는 관직을 보면 - 대학
사 심리란 者가 황제에게 올린글- 이부상서는 3
년간 공석, 좌도어사는 1년간 공석, 형부와 공부는 시랑 1명이겸직, 병부는 상서와 시랑이 모두
공석, 예부는 겨우 시랑1명, 호부에도 상서 1명뿐
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당상관 31자리중 24자리가
공석이었다한다. 이렇게 국정을 운영할 관리인이 없어 국정수행능력이 거의 전무한 상태인데도
만력제는 이런 복잡한 국면은 해결하려 하지않고 회피하면서 오직 여색을 즐기고, 후세들에게 자산을 물려주는 데에만 관심을 모았다.
자금성의 구중궁궐 세상과 동떨어진 깊숙한 그
곳에서 그는 사계절 따라 봄이면 접행 (蝶幸)놀이, 여름이면 형행 (螢幸)놀이, 가을이면 홍행(紅幸)놀이, 겨을이면 원앙회(鴛鴦會)놀이를 즐겼다. 접행놀이는 궁녀들에게 봄꽃을 머리에 꼿게하여 황제 앞에 늘어 세운후 황금상자에 넣어둔
< 한백옥 보좌가 3개, 가운데보좌의 청색항아리는 기름이 가득,당시 불을 밝혔다함.>
나비를 풀면 ,나비가 날아다니다가 궁녀의 머리에꼿힌 향기로운 꽃위에 않게된다. 그궁녀는 그날밤 황제에게 총애를 받는다는 놀이이고,형행놀이는 연못에 배를띄으고 여름밤 더위를 피하려고 부채를 든 궁녀들에게 갈대주머니를 열어 개똥벌레를 날리면 반딪불을 켜면서 날아다니던 개똥벌레가 한궁녀의 부채에 우연히 않고 그 궁녀는 그날밤을 황재와 함께 지낸다는 놀이이다. 그래서 궁녀들은 새벽부터 꽃에 맺힌 이슬을 받아서 부채를 감로(甘露)에 젖게 했다한다. 또한 정력을 키우기위해 잉어를 반 죽도록 때려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을 받어 먹고,주둥이가 긴 병속에 고기를 집어넣어 여우에게 주면 먹지는 못하고 침만 흘리는데 그침을 받어 마셨으며,그리고 산딸기 (복분자)를 밤마다 먹었다 한다. 무려 10만명의 궁녀와 환관속에서 이들과 함께 고립되어 살고 있는 것이다.
만력41년(1613) 9월 만력황제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명신종실록>> 한 이민족여인이 말을 타고 황재앞으로 돌진하는데 말발굽소리도 요란하게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손에는 긴창을 들고 갑자기 덤벼들었다. 황제는 숨이 멎을것같아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났다. 해몽은 명나라 강산을 빼았겠다는 뜻이 었다. 어쨌거나 만력 44년(1616)에 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에 올랐고 만력 46년(1618) 4.13일에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대명왕조를 토벌하기 시작한 것이 꿈과 우연일치인지 선견지명인지는 모르지만 명나라의 쇠망을 암시하고 있는�하다.
당시 명나라는 조세와 요역(搖役)을 차례로 은으로 대납케 하다가 급기야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하여 완전히 은본위제 (銀本位.silver standard system)을 실시하게 되었고 더욱이 엄청난 재정지출로 인해 은은 바닥이 났다. 더욱이 1588년
유럽에서 스페인이 무적함대가 영국에 궤멸되 스페인이 동방무역에 은 물물교환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만력제는 은광개발과 세
금신설로 은을 보충하려 하였는데 간신들이 가렴주구와 행패가 심하여 백성들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드디어 1604년 동림당(東林사건이 일어났다. 청렴한 관료와 재야 지식인으로 만들어진 동림당에서 부정부패한 관료들에 대해비판하고 농민의 궐기를 옹호한 사건이었다. 나라 안밖에서는 크고작은 전란(戰亂)이 있었는데 그중 군대를 동원했던 세번의 대란을 " 만력의3대 정 " 또는 "만력의 역(役)"이라한다.그하나가 "발배의 난"이다.
만력 20년 (1592) 3월,서북방쪽 녕하 (寧夏)에서 몽골인 발배(?拜)가 반란을 일으켜 오르도스를 장악하고 서북쪽까지 침입하였다. 계속 연패로 쫏기다가 요동(遙東)군의 총수 이여송( 李如松 )이가 겨우 진압하였다. 두번째난은 그 해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명나라를 치기위함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 ( 假遠征明 )는 것이 왜군의 침략이유이고 보면,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보내야만 할 처지였다.
락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를 선발대로 보낸후 발배의난을 평정한 이여송의 4만5천 군대를 곧바로 보냈다 ( 萬曆의 役).
셌째가 만력 25년(1596)에, 남쪽에 있는 귀주성(貴州省)에서 현지인들(苗族)의 추장인 토사(土司) 양응룡이 난을 일으켰다(楊應龍-亂). 이 난은 1600년 중앙정부가 토벌하였고 양응룡이 자결하여 겨우 끝이났다.
만력제는 황후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이귀비 소생의 장자 상락(常洛)을 황태자로 삼아야 하나 황제는 정귀비를 총애하여 그가 낳은 셋째아들 상순(常洵)을 태자로 삼으려했다. 그래서 1593년 신종은 아들3명을 왕으로 봉하고 태자 몫은 뒤로 미르려했다. 이때 강작한 성리학자,고헌성(顧憲成)이가 강력히 반발하여 면직당하였으나 후에 동림당을 만들어 정계에서 상순 태자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장자인 상락이 태자로 책봉이되었
<정문 ; 바닥에 표식이 하나 있는데 당시 길을 잃지 않게 표시한 것. 처음 발견된 문 >
다. 그후 만력제는 만력 48년,황제가 된지 48년만에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생애에 누렸던 권력과 부귀영화 를 사후세계에도 누리기 위해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자리를 택하고 국민의 혈세로 만든 아방궁인 지하왕국에 누웠다.
그 이상 더 무었을 바라겠는가 ! 허나 풍수지리도 명당자리도 권력도 모두 부질없는 것이 후세(後世)에는 비참하게 유골이 파헤쳐지고 돌에맞아 부서지는 死後破骨신세가 되었다.
1957년 만력황제의 정릉이 발굴되고 10년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 지주계급 우두머리 만력을 타도하라 ! "라는 황당한 구호아래 문물창고에 보존되어 있던 만력황제와 황후의 유골을 꺼내들고 정릉박물관 앞 광장에서 " 비판투쟁 "을 벌인뒤 10여명의 홍위병대장들이 바위로쳐서 유골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또한 그당시 문화제 발굴에 참여하고 있던 고고학자들은 온갖 고문과 자아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발굴 책임자 조기창은 발굴 보고서를 남기기위해 문화혁명당시 죄수수용소 인근 공동묘지 토굴을 발견하고 낮에
는 중노동,밤에는 자아비판, 한 밤중에는 공동묘지 토굴에서 초안을 쓰다가 들켜 감옥살이를 하였다. 모택동은 자본지배계급의 전형적 나쁜사례로 만력황제를 꼽았으며 이로인해 황릉발굴작업은 중단상태로 지연되었다.
중국에서는 황제들의 옛무덤을 발굴 해야될 지 에 대하여 찬반논쟁이 50년을 이어오고있다.
최근 무축천 건릉매장 1300돌 기념학술 좌담회에서 떠든 내용을 보면, 찬성론자인 소신방 ( 산시성 고고학연구소 명예회장 겸 당제 왕릉 연구실소장 )은 첸궁은 무축천 고종의 주검과 더불어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각종 유물들이 뭍혀있는 세계적인 지하박물관이다. 오늘날 과학기술로 볼 때 유물들을 충분히 잘 보존할 수 있으며 ( 지하궁전내에 땅속 환경과 유사하게 보존) 이런 훌륭한 유물들을 공개함으로써 중화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땅속이라고 무조건 보존이 잘 되는것도 아니다. 법문사 발굴당시 종이문서,비단들이 이미 다 썩어 있듯이 땅속에서도 계속 훼손되고 있다. 그외에도 지진,자연재해로도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반대론자인 쑤바이 ( 베이징대학 고고학 교수)는 세계 고고학계의 보편적인 시각은 " 과학기술이 충분치 않을 경우는 자연적보존이 인공보존보다 환경이 더 안정적이다' 라고 했고, 더 나아가 예원민 ( 베이징대학 고고학부회장 )은 " 문물보존을 위한 기술이 현재 완전히 해결 되었는가 ?"라고 의문으로 반박하였다.
실제로 진시황 병마용이 발굴되고나서 현재 산화되어 색채가 변하였고,비단,서적그림들은 외부 공기노출로 산화되거나, 세균으로 오염되거나 카메라 플러쉬로 손상되어 색채를 잃어 버리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고고학계주류의견이 여전히 발굴반대로 견지하고있다.
< "신종현 황제 지릉" 만력제의 비문이다. 치적의 글은 역시 없다. >
1958년 겨울농민이 우연히 첸링의 석실입구를 발견하여 1960년 5월 발굴팀이 석굴로 들어가려하자 주은래 (저우언라이)총리는 " 우리시대에 좋은 일을 모두 완성 할 수는 없다. 이 일은 후대인들이 완성하도록 남겨두기로하자."라고 하였다.
만력황제 시신파괴때도 홍위병들에게 문화제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주은래가 지시하였었다.
명십삼릉중 유일하게 발굴된 만력황제의 지하궁전을 보면서 이런 궁전들이 13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 지역은 필히 지하세계의 망령들이 집산지 이며, 지금도 이승과 저승을 배회하면서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혼령들이 슬며시 내옆에 서 있는 착각에, 주변 경관을 보면서 왠지 스산한 느낌을 느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손자인 주윤문에게 황제자리를 넘겨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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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혜종 건문제 주윤문 (明惠宗 建文帝 朱允紋)-
1377년 12월5일(홍무10년)에 황태자인 주표와
< 정릉 위에서 보이는 숲속 저 멀리 곳곳에 명황제 릉들이 산제해있다.> 후궁 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장남은 황
태자비 상씨의 소생 우왕 주웅영 (朱雄英)이었으나 어린나이에 죽어 주윤문이가 주원장의 적장손이 되었고 아버지(주표)가 38세로 죽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적장손 과 연왕 주체를 염두에 두었는데 학사 유삼오(劉三吾)가 " 장자가 죽으면 장손이 이어야한다" 고 강력히 주장하여 주윤문이가 황태손이 되었다. 주원장이 죽자 주윤문은 22세나이로 명나라 제2대 황제가 되었고 할아버지 주원장이 유언대로 숙부들에게 남경으로 문상을 오지말라 하였다. 실상 숙부들( 번왕 )의 세력은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너무나 커져 있었고 몰래 저항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눈치첸 건문제는 번왕들을 남경으로 은밀히 불러들여 체포한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연왕 주체는 1399년(건문 1년)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정난의변( 靖難之變 )이다. 반란을 일으킨지 3년, 1402년 7월 연왕 주체는 결국 수도 남경성을 포위,함락시킨다. 건문제는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고 그후
건문제의 행적은 전혀 알길이 없다.
< 불량 벽돌을 만든 장인을 처벌키 위해 벽돌마다 장인의 이름과 일시를 적게한 것> 연왕 주체가 황위에 오르니 그가바로 영락제이다.
- 영 락 제 ( 永 樂 帝 , 주체, 문제,태종 ) -
중국 明朝 의 제3대 황제 ( 재위 1402-1424 ; 출생 ; 1360.5.2 - 1424.8.5 ).
이름 ; 주체 (朱체). 연호 ; 영락 (永樂). 시호 ; 문제 (文帝). 묘호 ; 태종 (太宗 ; 후에 成祖로바뀜). 明기간중 가장 번성한 시기. 난징에서 태어났으며 26명의 왕자 중 넷째였다. 최근 학자들은 고려출신인 둘째왕비의 소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주원장의 덕망이 높은 정실,마황후(馬皇后)을 법적 모친으로 보고있다.
1370년, 10세가 되자 주체는 연왕(燕王)으로 책봉되어 지금의 베이징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성장하면서 점차 아버지의 강인하고,공격적이고,변덕스러운 성격을 닮아 지도자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하자 주체는 주원장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당시 황태자 이외의 왕자들은 전략지역에 배치하여 번왕(蕃王)으로 봉하였었다.
1380년 20세인 연왕은 북부국경에서 소규모전투을 하며 경험을 쌓고 1390년 30세에 이복형인 진왕(晉王;서쪽 山西省의 번왕)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정벌하고 그후에도 계속 몽골족을 괴롭혔다. 38세에 부친 주원장이죽고 조카 건문제가 황제가 되어 실세인 번왕들이 세력을 약화 시키려하자, 위기감을 느낀 연왕 주체는 1399년8월 " 황제주변 간신들한테서 미숙한 황제를 구출하자 "라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3년후 1402년 7월 궁정의 환관들이 연왕군대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결국 난징성은 함락됐다. 사흘뒤 연왕 주체는 옥좌에 않고 1403년 통치가 시작되었다. 재위에오르자 주체는 건문제의 측근들, 일가친척 모두를 죽이고 수천명이 죽은후에야 숙청을 끝냈다. 건문제의 정책들은 모두 없애버리고 건문제가 집권한 적이 없는 것처럼 역
사를 다시쓰게하여 묘호도 태종이라 하였다.
번왕의 권력도 축소하고 행정권도 박탈하여 놀고먹는 번왕으로 만들어 공격 할 수없게 하고 사업감독관,군사지역 감찰관,동창 (東敞 1420년.반역
< 우리나라 현대차 아반때가 北京現大自動車, 택시로, 반갑네잉 !> 자색출 환관위원회)등 지금의 비밀경찰부서를 만
들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영락제이후부터는 악명이높아 공포의대상이 되었다).
궁정에서 서적을 편찬하는 기관인 한림원(翰林院),유학자들 도움을 받으며 정치를 효율적으로 하여 사회,경제를 안정시키고, 문화적으로는 만천권이넘는 영락대전(永樂大典)을 만들었다. ( 무인출신인 영락제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중국의 남쪽국경에 관심을 갖다가 1403년 3개 함대를 파견하여 자바섬과 인도남부 전역에 그의 즉위를 알렸고, 말라카.부르나이를 비롯 여러 군주들이 조공을 보내왔다. 당시 유명한 함대 사령관은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鄭和)였다. 그는 1405년부터 28년간 7차례나 먼 외국,페르시아만과 홍해,아프리카 동해안을따라 잔지바르까지 남하하여 37개나라를 방문하고 영락제의 종주권을 따고 공물을 받었다. 티베트와 네팔에도 환관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고 중앙아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러시아의 르키스탄까지 파견 관리했다. 일본까지도 종주권을 행사했는데 당시 실권자는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였다.
<玉 麒 麟 ( 옥기린 ) 면세점 ; 옥돌과 칠보공예품 판매> 왜구들이 중국해안에서 약탈하다 걸린자들을 중
국에 보내어 처벌받게 하였다. 쇼군(將軍)에게 실권이 넘어간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다시 노략질을 하였다. 안남 ( 베트남 )에서는 1400년, 진씨(陳氏)왕조 후계자인 어린 트란이 폐위당하고 찬왕조가 득위되었다. 트란측근들은 트란이 합법적 통치를 할 수있게 해달라고 영락제를 졸랐고 1406년 안남에 명사신을 보내자 찬왕조는 사신을 죽여버렸다. 성질난 황제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안남을 정복하고, 진씨왕조 후계자가 없자 1407년 중국의 일개 성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러나 줄기차게 안남(베트남)인들이 저항하자 (1418) 손자인 선덕제에 와서 1428년 베트남통치를 포기 하여 안남평정은 결국 나쁜사례가 되었다.
중국왕조들이 항상 꺼리는 지역이 북쪽국경지역인데 반해 영락제는 그런데로 잘 유지하였다.
1402년 그가 연왕이었을때 조카 권문제에 대항하여 남쪽 난징으로 진격하면서 중국북동부 지역의몽골부족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바 있었다. 그후 보답으로 만리장성쪽 전투사령부를 철수시켜 우리앙가드 몽골족 자치권을 부여하고, 북지역은
< 붉고 여러색을띤 대형옥석에 섬세하게 조각한 작품 > 동몽골족(타타르족)과 서몽골족(오이라트족)이
그들끼리 싸우고 있어 방치하다가도 북벌하고, 먼 서쪽 투르크-몽골제국,정복자 티무르가 걱정이 었으나 1405년 그가죽자 티무르후계자와 관계를 잘 맺었다. 영락제 시대에 가장중요했던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것이었다.
실제로 베이징은 중국의 경제,문화의심장부와 멀리 떨어져있고 북쪽국경과 가까이 있으며 곡창지대인 양쯔강유역과도 멀리있어 이상적인 수도라고 말 할 수는 없다. 허나 영락제의 세력기반이면서 북부지방의 수비를 효율적으로 감독할 수있는 장점이 있었다. 1407년 천도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1420년 새 궁전이 완성되어 1421년 정식으로 수도가 되었다. 양쯔강과 황하강을 잇는 산둥반도을 우회하는 연안수송로가 재건되고 해군사령관 진선(陳瑄)이 지휘로 대운하를 재건하여 베이징까지 물자공급이 원활하게 되었다. 영락제는 1424년 몽골원정에서 귀경하다 8월 진중에서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2대 황제로 만든 태종 묘호는 명3대 황제 성조(成祖)로 바뀌었다.
< 옥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예술인이라기 보다는 기술공이다 > - 제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
이름은 주고치( 朱高熾), 연호는 홍희제,묘호는 인종이다. 재위는 1424-1425년 8개월간하였고 출생은 1378-1425년,만47세에 사망, 영락제 주체나이 18세에 명초 위대한 장군의 딸, 정실 서 황후사이에서 맏아들로태어났다. 그는 1404년 (만26세)에 황태자로 책봉되어,아버지가 수도를 비울 때마다 국정을 감시하고 정사를 결재했으며 재위 8개월의 짧은 기간에도 형벌을 줄이고,변방의 수비를 개선하고, 건문제의 신하와 가족들을 사면해주고 북벌에 반대한 하원길등 구신들을 석방하는등 깨끗한 정치를 하였다.
- 제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
이름은 주첨기(朱瞻基), 연호는 선덕, 묘호는 선종이다. 재위는 1425-1435년(11년), 출생은 1398.2.25-1435.1.31(만 37세).
홍희제 주고치와 황후 장씨(張氏)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 주체의 총애를 받아 태자 폐립문제를 거론 할때 손자 선덕제가 물망에 올랐었다. 당시 영락제 주체의 자식들을 보면 장
< 두꺼비들로 둘러쌓인 금붕어玉石 항아리.등은초록 배는 노랑 정교하다. > 남인 주고치는 인자하나 병약하고, 둘쩨아들 주
고후는 무술은 특출하나 다혈질이며 난폭하고,셋째아들은 역모사건으로 낙양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 숙부인 한왕(漢王) 주고후가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제는 직접 나서 반란을 진압하고 숙부 한왕과 일족을 자금성의 서인문내에 소요성(逍遼城)이라는 건물을 새로짓고 유폐시켰다. 그후 선덕제가 숙부를 찾아 갔을때 숙부는 선덕제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렸다. 분노한 선덕제는 한왕 주고후를 구리항아리에 가두고 밀쳐나오자 장작더미에 달궈 죽였다. 정치로는 할아버지 주체가 환관의 정치기회를 막은반면 오히려 내서당(內書堂)을 만들어 교육시키고 태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후에는 황관들이 정사를 농락시킴). 이시대는 외침도 없고 경제도 풍요로운시대였으며 그는 검소하여 궁궐이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막고 <경부기(耕夫記 ;황제가 능을다녀오다 만난 농부에게 쟁기를 받아 몇번 끌어본 뒤 힘든 것을 알고 쓴책)>을 쓰고 서민이 어려운점을 고려하였으며 이시대를 인선의치(仁宣之治)라 하여 높게 평가하고있다.
< 둥근 유리에 작은 구멍을 통해 그림과 글씨를 쓰고있다. 진기명기다 >
- 제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
이름은 주기진 (朱祁鎭), 묘호는 영종,시호는 예제(睿帝), 연호1.-정통, 연호2-천순(天順), 재위 1435-1449,출생은1427-1464
1435년 재위에오른 어린 정통제는 어머니 태후가 섭정을 해 주었고 후에 황관 왕진(王振)을 특별히 신뢰하여 조정을 맡겼다. 성년이 될무렵 몽고족 오이라트부(部)의 대장 에센이 무역마찰로 중국의 서북쪽,실크로드이며 오아시스인 하마도시를 침공하자 -위구루인들이 대상무역 중심지- 위키백과사전에는 산시성 다퉁(大同)으로 침공 했다함- 1449년 왕진은 장군들이 충고도 듣지않고 50만 대군을거느려 황제가 직접 정벌에나서게했다. 결국 군대는 토목보(土木堡)에서 대파하고 황제는 포로가되었다. (토목의변). 패전소식을 들은 북경조정은 큰 충격을 받고 남경(南京)으로 천도하자고 떠들었다. 그때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宋 960-1279)을 기억하라! 북경을 지켜라 !"하고 조정을 안정시켰다
황관 왕진은 충고를 계속무시하다가 피살당하고, 조정은 영종의 이복동생,주기옥(朱祁鈺)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 에센은 붙잡은 영종을 빌미로 협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주기옥은 형인 영종을 대려와 다시 황제자리를 물려 주어야하는 문제가 생겨 협상을 꺼려했고 화가난 에센이 북경을 침범했으나 또 실패하자 영종을 그냥 풀어줘 버렸다(1450). 돌아온 영종은 동생이 황제로 이미 등극되어 태상황(太上皇)상태가 되었고 자금성의 남궁(南宮)에 유폐되어 버렸다. 경태제는 불안하여 영종의 아들이 황태자 직위를 폐하고 대신 자신의 아들을 등극시켰으나 아들마저 곧 죽어버렸다. 1457년 경태제가 병석에 �자 일부 軍,官,점성술사가 모여 이른 새벽에 남궁에 유폐된 영종을 가마에 태우고 몰래 자금성의 정전(奉天殿)에 모셔다 놓았다. 날이 밝자 조신들이 모였고,옥좌의 천자가 경태자가 아닌 정통제라는 것을 알고 기겁하여 누구하나 이유를 뭍지않고 그대로 조하를 올렸다. 그리고 평상업무로
돌아갔다. 8년만에 옥좌를 찾은셈이며 결국 죽어가는 경태제를 처단하였다. .이를 탈문의 변이라한다. 그후 7년간 통치했으나 환관들의 꼭두각시 놀이만 하였다.
- 제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
영종 정통제가 -경태제 -다시 복귀하여 -천순재 . 결국 정통제 = 천순제
- 제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
이름은 주견심(朱見深 1447.12,9-1487,9.9).묘호는 헌종 연호는 성화(成化) 재위 ( 1464 - 1487.). 영종과 효숙예 황후 주씨의 장남으로 숙부인 경태제가 당시 주견심이 황태자직위를 폐위시켰다가 아버지 영종이 다시 복귀시켰고 황제로 즉위한후 에는 도교와 불교를 신봉하여 제사의식을 주로 많이 거행하여 국가제정을 악화시켰다.
만귀비(萬貴妃)는 본명이 만정아(萬貞兒)이고 정식호칭은 공숙귀비(恭肅貴妃)이다.성화제의 후궁으로 성화제보다 19세 연상이었다. 본래 궁녀
였으나 성화제가 좋아해서 후궁이되었고 아들을 낳았으나 곧 죽어버렸다. 이후부터 그녀는 성화제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들은 모두 강제로 낙태,독살,매질을 하였고,황후 오씨를 모함하여 폐위 시켰다. 성화제가 만귀비를 황후로 책봉하려하였으나 성화제어머니인 주황후(朱皇后)가 반대하였다. 현비백씨(賢妃 柏氏)도 성화제의 아들을 낳고 만귀비에의해 아들과함께 독살되었다. 궁녀 기씨(紀氏)도 황제의 아이를 임신하자 만귀비에 의해 낙태약을 먹게하고 별궁에 유폐되었다. 허지만 기씨는 무사히 아들를 낳기는 하였으나 독살이 무서워 환관에게 애를 버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환관은 몰래 민가에서 이 아이를 키웠다.( 폐후 오씨가 키�다는 설도 있다). 1475년 성화제는 문득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알고 한탄하던중 환관으로 부터 아들이 살아 있음을 알고 대단히 기뻐하여 당장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런후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가 바로 효종 홍치제(孝宗 弘治帝)이다. 이 사건으로 궁녀 기씨는 만귀비에의해 독살당하고 후에 아들 에의해 " 효목
순황후"로 추존되고 만귀비는 1487년 41세로 숨졌
< 만리장성관광지 입구에 "중국장성박물관" 관람 못하여 궁금 > 는데 성화제는 슬퍼하였다한다.
- 제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
등극할 당시는 나라의 위기감과 국력이 매우 쇄약해지고 있을 때였다. 즉위하자 곧 간신들을 몰아내고 재능있는 인재들을 뽑아 ( 구준서부,유건,사천,이동양 등) 국가의 기밀사무를 보게하고 황실친척들과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금지하고 조세를 낮추고 이제민을 구하고 생산을 발전시켜 정국을 비교적 안정시켰다. 사가들은 이를 "홍치증흥(弘治中興)"이라고 일컫는다.
- 제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
홍치제의 맏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불교와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했으나 황제가된 뒤부터 미녀를 후궁으로 삼아 음탕한 생활을 하고 라마교를 광신하고 유희를 즐겨 국비를 낭비하였다. 농민반란과 포루투칼이 자주 내항(來航)하여 나라안팎이 어수선할 때 난징에서 보트타고 물놀이하다 익사하였다,그는 후세가없어 사촌동
생 주후총(朱厚憁)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생애(1491.10.26 -1521.4.20.). 재위(1505-1521)
- 제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
생애(1507.9.16,-1567.1.23). 재위(1521-1567). 이름은 朱厚摠. 묘호는 世宗.
흥헌왕(興獻王),주우원(朱祐阮)의 장자로 태어나 자식이 없던 정덕제가 죽자 황위에오른다. 즉위하자 生父인 홍헌왕에 대한 존호(추존문제)와 제사문제등으로 대신들과 오랜 갈등이 빚어 정치의 부폐을 야기했다.
[임인궁변] ; 즉위한 후에도 정사는 보지않고 오직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제조에만 미쳐 심지어 궁녀의 월경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임인궁변(1542년,가정21년)의 원인이 되었다. 사건내용은 가정제가 단비(端妃)조씨(曺氏)궁에서 잠을 자는데 궁녀 16명(양금영,형취련등)이 나타나 그를 목졸라 죽이려하였다. 이때 셋째부인 황후 방씨가 급히 달려와
목숨을 구하고 그후 궁녀 16명을 능지처참하고 이와 관련된 단비 조씨와 영비왕씨도 주살되었다. 가정제는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성격이 있어 첫 황후 진씨(陳氏)를 투기가 심하다고 발로걷어차 복중에 아들과 함게 죽게하고, 둘째황후 장씨는 자신의 만든 약을 먹지 않는다고 폐출시켜 냉궁에서 병으로 죽게했다. 자기가 좋아했던 영비가 임인궁변으로주살되자 괜히 자신을 살려준 방씨를 앙심품고 그후 그녀가 거쳐하던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타죽게 내버려두었다.
정치적으로는 내적으로는 민란,외적으로는 몽골과 왜적이 위협이 있는데도 부폐한 정치를 일삼아 명제국은 점차 위축되어갔다.
- 제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
생애(1537-1572). 재위 (1566-1572)
가정제의 3째아들이며 만력제의 아버지이다. 즉위후 서계,고공,장거정을 재상으로 등용했다. 가정제때부터 계속 오이라트部의 알탄 칸이 大同,선부(宣府)등을 여러차례침범했으나 군대를
< 만리장성으로 오르는 케이블카 > 보내어 모두 격퇴시켰다. 그리고 그 알타칸을
1570년(융경 4)에 순의왕 (順義王)에 봉하고 교역을 허락했다. 변방을 강화하여 서북변경지역이 안정되고 안으로는 궁전건축을 줄이고 몸소 절약하여 후세에 칭송 받고있다.
제14대 신종 만력제 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 제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
1620년 7월 만력제가 죽자 결국 장남 주상락 (1582-1620)이 간신히 살아남아 즉위하고 연호를 태창으로 고쳤다. 즉위하자 즉시 내탕(內帑=은행)에서 100만냥의 은을풀어 누루하치와 싸우고있는 요동의 장사들에게 지급하고, 은광을 캐는데 광산에 관여되는 악명높은 세무사인 광세자(鑛稅使)파견을 중지시켰다. 허나 태광제는 이것으로 즉위 한달만에 급사하였다.
할아버지 주체가 환관들에게 정치적활동을 막은것에 비해 명5대 선덕제 주첨기는 오히려 내성당을 세워 교육시킨 이후부터 점차 환관들이 정치참여가 심해지고 만력제에서 천계까지 당파싸움
은 극에달하기 시작하였다. 만력제가 정귀비에서 난 3남 주상순(朱常洵)을 황태자로 삼으려 할때 동림당은 장유(長幼)의 순서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여 19년간 미뤄온 황태자자리에 주상락을 겨우 않혔는데, 1615년 괴한 장차(長差)란자가 몽둥이를들고 난입하여 황태자를 죽이려 하였다.
이때 재상이던 방종철(方從哲)이가 대사건임에도
철저한조사를 하지 않자 배후에 정귀비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동림당에서는 방종철이를 탄핵했다 [(1)정격안(檄案) 안=사건].
태창의 급사원인도 관원인 이가작(李可灼)이가 바친 붉은환약을 먹고 죽었으므로 시약업무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동림당에서 방종철이를 공격하였다[(2)홍환안(紅丸案)]. 태창이 죽자 황자 주유교를 보호한다고 태창제가 좋아하던 후궁 선시 이씨(選侍 李氏)가 자기 궁인 건청궁에 숨기고 위충현과함께 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를 동림당이 이씨에게서 황자를 때어내고 이씨를 별궁으로 옮겼다 [ (3)이궁안(移宮案)].
이를 합쳐 삼안(三案)이라 하며 黨爭이 격심하였
음을 알 수있다. 당파들을 보면 절당(浙黨),초당(楚黨),선당(宣黨),제당(齊黨)곤당(昆堂)등이며 주로 동림당과소당이 중심이었다.
- 제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
이름은 朱由校. 묘호는 喜宗. 시호는 哲帝. 연호는 천계이다. 생애(1605-1627). 재위(1620-1627).
15세나이에 황제가된 그는 국정일은 안보고 목공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전에 황태후를 모시던 환관의 우두머리이며 자신의 유모와 친분관계가 있던 위충현(魏忠賢)에게 조정의 권 력을 넘겨주었다. 당나라 역사상 가장 권력을누린 환관이 되었고 곳곳에 자신을 칭송하는 사원 까지 세웠었다.
이 시기에는 여러곳에서 주변침입을 받었다. 네델란드가 타이완(중국의 보호령)을 점령하고, 만주족들은 무방비인 북동지역[라오허강= 요하(遼河)]을 점령하였으며 남과 남서쪽은 반란이 일어났다. 국고가없어 황하강둑이 무너져도 수리를 못하는 통제불능의 시기로 몰락되었다.
- 제 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
생애(1611-1644). 재위(1628-1644).
광종 태창제 주상락(제15대)과 현비 유씨(劉氏)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희종 천개제가 1627년 8월, 23살나이로 죽자 유언에따라 信王 주유검이 황제로 즉위되었다. 형인 천개제는 아들 셋모두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승정제는 즉위하자 맨먼저 실권을 잡고있는 환관파 두목격인 위충현과 그의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고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東林派들을 등용하고 農政에 유능한 기독교인 서광계(徐光啓)을 예부상서로 두고,서양기술도 적극수용하여 대포도 연간 20문을 만들었다. 1629년 5월 일식(日蝕)이 정확히 예측되는 것을 알고 [대통력(大 統曆)보다 西洋曆이 더 정확함] 歷局을 설립하여 서광계와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을 초빙하여 역법을 수정하였다 <승전역서(崇禎歷書 1635)>.
제정악화로 기상,치안,운하등을 전파하는 역전제도(驛傳制道 ;역마다 말를 배치하여 소식을 알림)
도 폐지 하였는데 이로인한 대량 실업자발생으로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가담하는 역 효과를 보기도 하였다. 숭정제는 타 황제와는 달리 여색을 즐기지도 않았으며 성실하여 천재지변이나 사회적혼란이 있을 때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 꾸짖는 조서)하여 참회하고 자신의 잘못를 인정하였다. 당쟁은 여전하고 장병은 부패하여 군사력은 약해지고 군비과다지출과 수해가뭄으로 기근이 겹치자 농민들이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는데,처음 샨시성에서 이자성이가 농민군을 이끌었다. 불행하게 숭정제는 성격상 의심이 많고 남을 믿지않아 간신은 중신으로, 중신은 간신으로 오인하여 죽이는 큰실수를 범하게된다.
그중 적의 간계로 산해관(山海關)에서 만주족을 지키고 있던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죽인 것이 큰실수였다. 결국 시안(西安)을 근거지로 대순(大順)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세력을 확장한 이자성군대가 1644년(숭정17년)3월17일 베이징을 공략했다. 사실 이자성군대가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으나 무능한 조정들이 미리 겁을먹고 피신하는 바람에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18일 숭정제는 세아들를 피신시키고 비빈과 공주는 직접 죽여 욕보지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관병과 대신을 소집하는 종을 울리게 하였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내관 1명 왕승은(王承恩)만의 그의옆에 있었다. 숭정제는 황후에게 자살을 명하고 자신은 경산으로 올라가 수황정(壽皇亭)누각앞 회나무 괴목에 목메어 죽었다. 즉위 17년,유서에는" 짐이 덕이없어 하늘이 나를 꾸짖으며,죽어서 선조들을 볼 면목이없으니 내 황제의 관을 벗고 헝클어진 머리로 수치스러운 얼굴를 덮어달라"하였다. 망하는 나라를 보살피느라 자신의 능도 준비하지 못한 숭정제, 우선 측실
의 전귀비(田貴妃)묘에 가운데 숭정제 양옆에 주
황후와 전귀비를 �혔다. 우선묘호를 사종(思宗),다시 의종(毅宗),다시 懷宗(회종) ,최후로 청3대 순치16년(1659)에 베이징13능으로 옮기면서 사릉(思陵)이라하고 장렬민황제의능(莊烈愍皇帝之陵)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명나라 황제순위중 제6대와 제8대가 같은 영종이어서 제8대의영종은 빼고 제8대를 헌종 성화제 주견심으로 시작하여 차례가 바뀌어 적기도한다.
만리장성 ( 萬 里 長 城 )
만리장성(완리창청)은 흉노족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BC208년 춘추전국시대때 제나라에의해 처음 착공된 후 중국의 고대 진나라(시황제)때까지 세워져 현재까지 북부일대에 존재하는 오래된 성곽이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고 중국에서는 그냥 장성이라고한다.
총길이 6352 km이며 하북성 산해관(河北省 山海關)에서 감숙성(甘肅省)까지이다.
< 성을 쌓은 돌틈사이에는 세멘트로 붙혀있다. 관광지역에만 튼튼히 축조. > 만리장성은 정확히 한시대에 누구에의해 만들어
진 그러한 축조물이 아니고 춘추전국시대에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여러나라가 축조한 장성이며 오랜세월동안 시대에 맞추어 보수되고 재건되고 신축되는 과정을 밟아 온 것으로 여겨진다. 시대적순서로 나열 정리해보자.
1.기원전 10세기,중국 고대 청동기시대인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때 재상 태공망(太公望)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 제(齊)나라이다. 그당시 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왕실을 인정한 시대이고 전국시대는 주나라의 왕실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 나라로이행하는 시기인데 이를 합쳐 춘추전국시대라 칭한다. 전국 칠웅으로는 진,조,위,한,제,여,초 나라들이며 이때 제(齊)나라가 처음으로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에 성을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 기원이다. 그러자 전국7웅들도 서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2. BC771-221년,진(秦)이 7웅들을 하나씩 모두 제압하고 BC247년에 어린 영정(瀛正)이 왕위에 오르면서 진제국을 세운후(BC221) 자신을 진 (秦) 시황제(始皇帝)라 하였다. 정복사업은 끝나
고 흉노족들이 침입과 거대한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그는 만리장성을 쌓는 토목공사에 온 힘을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절반은 전국시대때 연(燕),조(趙)가 쌓은 장성이다. 그 당시 장성의구역을 보면 서방은 간쑤성(甘肅省감숙성) 의 민형(岷顯)부근을 기점으로 남에서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북쪽을 감아돌아 조(趙)의장성과 만난후 그 동쪽끝을 연(燕)의장성과 연결하여 둥베이(東北)지구의 랴오허강하류까지 장성을 쌓았다.
3.진이 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선후 전한(前漢)무제(武帝)때,란저우(簡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흉노들이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것이었다.
4.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39-589년) 에는 북방민족의활동으로 6세기중엽 북제(北帝)는 다퉁(大同)북서에서 지융관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까지 장성을 축조하였다.
5. 수(隋)나라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내몽골 자치구의 중남부(오르도스)남쪽에 성을 쌓았다. 당나라때는 북쪽까지 점령하여 방어선이 불필요했고, 당5대이후에는 북방민족에게 점령당하여 그냥 방치되었다.
6. 명(明)나라대에와서 몽골족을 내쫓고 재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조된 만리장성이, 오늘날 현재의 모습이며 관광지 대상이 되고있는 바다링 (八達嶺)이 그곳이다. 구조는 높이 8.5m,두깨는 밑부분6.5m, 윗부분5.7m이며 위에는 높이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담으로 성가퀴를 만들고 총구멍(銃眼)내고,120m간격을 두고 파수대(돈대 墩臺)를 만들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그림에서나 봐왔던 그 만리장성의 길다란 성곽위를 직접 걸어 보았다. 매우 가파라서 미끄러질 지경이었다. 성은 매우튼튼하였고 돌틈사이에는 세멘트로접합되어 있었다. 과연 과거모습 그대로인지가 의심스럽다. 장성을 축조하면서 죽은 노역자는 그대로 돌틈속에 뭍혔다고하니 장성은 곧 노역자들이 무덤이기도하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이 있다. 내용을 보면 진시황때 한 여인이 결혼한지 한달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자로 징용되어 가 버렸고 홀몸이되었다. 어느날 과객을 만나 몸을 뺐길 위험에 처하자 그 여인은 꾀를내어 과객에게 간청한다. " 노역장에 가 있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이 옷을 전해주고 싶은데 이 옷을 전해준다면 당신을 따르겠노라"하고 몸을 허락하였다. 과객은 약속대로 부역장을 찾아가 십장(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였고 십장은 옷갈아입고 쉬는 동안 당신이 대신 노역을 하라하고 노역장으로 보냈다. 그 남편이 옷보따리를 펴보자 편지가 있었다. " 옷을 전달한 이 사람에게 당신을 위하여 제가 몸을 허락하였읍니다. 몸을 준것을 용서한다면 이 자를 대신 노역자로 쓰게하고 몰래 나오십시오! 만일 용서 할수 없다면 그 사람을 보내시고 저는 이 자를 따라 가겠읍니다" 라고 써 있었다. 남편은 사랑스런 아내에게 곧장 달려갔다고 한다.
7. 청나라시대는 만주의 여진족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명나라를 삼켰으니 군사적의미는 없고 행정적 경계구역으로 존속하였다.
.지역마다 장성의 견고성에 대하여 다소 차이가있다 . 산하이관부터 황허강까지는 매우 단단히 구축되어 있고 [성의 외관은 구워서 만든 기와로 덥혀있다 이를 전(塼)이라함], 반면에 황허강 서쪽부근은 햇빛에 말린 벽돌을 사용해 매우조잡하다. 청나라때에 보수를 하지않고 방치하여 원형을 찾기가 힘든 곳도 많다. 문화혁명때는 농부들이 집수리 및 돼지축사로 이용하려고 돌을 훔쳐가 1977년 부터는 법으로 막았다.
2006년 중국장성학회의조사에 의하면 만리장성중 잘보존된곳이 20%이하이고,일부현존해있는 곳이 30%,나머지50%가 소실되었다고보고했다.
용 경 협 ( 龍 慶 峽 )
만리장성을 본후 다음 코스인 용경협으로 출발하였다. 약 40분이 지나고 나서야 어느 관공서 같은 건물, 정원뜰이 보이는 출입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건물과 정원사이의 앞마당 길을따라 약 300m 를 걸어 갔을때 우측에 산이보이고 그 산봉우리 능선에서 부터 밑에까지 붉은 글씨로 龍 慶 峽이라는 대형문자가 새겨저 있는 것을 보았다. 강택민주석이 직접�다는 글씨체이다.
용경협은 북경에서는 약 85km, 팔달령(만리장성)에서는 약20km, 용경현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10km떨어진 곳이다. 좀 더 들어서자 막다른 곳에서 용을 형상화한 노란색몸통이 산허리를 휘감고 있고 산과산사이의 협곡에는 대형 저수지댐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타산( 海粉山 하이펀산,해분산)아래 고성하의 계곡물을 콘크리트 댐으로 72 m 높이로 올리고 양쪽벼랑사이를 꽉 막아놓은 것이다. 저수량이 무려 약 800만m'''나 된다. 수면은 해발 570 m이며 용경협의
총구간은 7 km이다. 이 댐은 73년에 개발되었는데 모택동이 이 지역을 돌아본 후 댐건설을 지시하였다 한다. 이 용경협을 건설하는데 중국과 홍콩이 합작하여 당시 중국돈으로 3500만위안( 한국돈 약 50억원)이 들었다 한다. 20층높이(72m)의 댐우측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댐아래에서 댐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타가 용이 입(입구)에서 꼬리까지 무려 258 m 나 길게 놓여 있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였다. 우리는 96년에
에 탄생한 이 용이 입속으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계속 댐이 상층부로 올라갔다. 이렇게 긴 에스컬레이터를 보면서 지난번 장가게에서 이보다 더 높은 절벽에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중국인들은 대국인 답게 이런 대형물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벗어나 작은 터널을 지나자 갑자기 깍아지를 듯한 산 봉우리의 절벽들과 호수가 나타났다. 갑자기 이상한 장소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이런 극적인 효과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호기심과 환상적인 감흥을 일으키게한다. 여기가 구곡호 (九曲湖)이다. 호수입구에는 가두리양식장같은 구조로 많은 잉어들이 여유롭게 유영하고 있고 선착장에는 많은 유람선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유람선을 타면서 갑자기 한기가 엄습하였다.
여름철에도 평균기온이 6.4'c라 하니 당연한 일이다. 유람선들이 분주하게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탄 유람선도 서서히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갔다. 상류로 올라 갈수록 거대한 절벽들이 협곡들 사이사이에서 가파르게 치솟아 오르고 각 산봉우리마다 형상들이 재각각이다. 산봉우리나 절벽의 그 모양세가 기이하면 언제 어디서든 어김없이 별명이 붓게 마련이다. 여기서도 보면, 신이 연필을 꽃아 놓은 모양이라하여 신필봉 (神筆峰), 절내의 범종을 업어 놓은 듯한 종산(鐘山), 관리인모자를 업어놓은 듯한 봉관도(鳳冠島)가 있다. 이따금 절벽에 붉은 글씨체로 용경협이라고 써있다. 모두다 강택
민 주석의 필체라고한다. 어떻게 해서 절벽에다 저런 글을 쓸수 있으며, 중국인들은 과연 저런 풍경이 자연그대로인것보다 더 풍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느 절벽위에는 정자가 한가롭게 보인다. 갑자기 관광객들이 " 사람이 떨어진다!"라고 소리치기에 쳐다보니 절벽위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있었다. 돌아올때는 절벽사이에 외줄이 걸려있는 위를 자전거가 지나가는 묘기가 있었는데 거의다 지나가는 지점에서 잠간보았다. 이런 볼거리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새로운 재미를 더해준다. 용경협이 전체구간은 약 21 km 이며 이중 유람선은 7 km 만 운행하여 약 40분이 소요되고 총면적은 119 km''나 된다.
대체로 남쪽이 부드러운 산수라면 북쪽은 웅장한 모습인데 용경협은 이 두가지를 모두 갖추어 있다. 계림의 리강을 구경하는데는 8시간이 소요되고 멀리서 산수를 감상하는데 비해 용경협은 40분이 소요되고 계림의 산수를 망원경처럼 눈앞으로 끌어당겨 코앞에서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북
경의 " 소계림 ( 小桂林 ), 또는 소삼협 ( 小三峽 ) "이라고도 불린다.
다시 말하면 인위적으로 땜을 만들어 인공호수 을 생성케하고 30여개의 산봉우리의 절벽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만들어진 한폭의 산수라고 보면된다. 용경협은 관광을 3부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유람선을 타고 산수를 감상하는 것이고, 둘째는 등산코스로 절벽위로 구연동,금강산,신선원이 있다. 셋째로는 겨울철에 환상적인 얼음의 축제,빙등예술절 ( 氷燈藝術節 )행사로 매년1월에서 2달간 4000 m''의 얼음바닥위에 펼쳐지는 빈등제를 구경하는 것이다. 유명한 하얼빈의 빈둥제라면 이곳은 " 작은 하얼빈의 빈둥제"라고 칭 할수 있을정도로 그 재미와 아름다움에 전혀 손색이 없다. 올해로 16회를 맞이 하고있다. 북경인들은 하얼빈의 빈둥제대신 이곳에서 재미를 만끽하고있다. 얼음조각으로 얼음성,건축,등을 만들고 여러색을나타내는 등과 빛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한다.
용경협은 여름과 겨울이 주된 여행계절이며 여름은 피서로 겨울은 얼음축제를 보는 것이다.
용경협은 원래 명나라때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수만리 떨어진 계림에 갈 수가 없어서 어느 황제를 위해 협곡을 막아 만든 절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이 씨가된다하지만 좀 황당해보이는 말인듯하다.
용경협은 북경의 16명소중 하나로 가치가 높다.
산봉우리들은 모두다 돌산이어서 가파르게 절벽을 이루고있고 돌틈사이로 사철나무들이 뿌리를박고 자라고 있다. 그래서 번지점프하기에 조건이 좋았든 모양이다. 번지점프는 고무밧줄로 발이나 허리에 고정시키고 높이 50m 점프대에서 수면이나 지면을 향해 떨어지는 게임으로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순간의 공포감을 즐기는 게임이다. 원래는 남태평양의 바누아투 등에서 성인식때 치르는 의식이 하나로 용맹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은 1995년 대전 세계박람회장에서 처음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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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의 역 사.
중국은 7000년 역사를 갖고있다.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왜래문화를 오히려 자국(自國)으로 동화시켜 더 풍부한 문화를 형성하고, 여러민족이 합쳐진 대국(大國) 이면서도, 정치,사회,문화의 단일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그 밑바탕에는 ,항상 통일을 지향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쯔강(揚子江)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군사적보호를 남쪽으로는 풍부한 농업생산으로 경제적이득을 합쳐 안정된 정치를 형성케 하였다. 역사적으로 분열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재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을 시대적으로 관찰해보자.
선사시대
1. 구석기 시대
구석기 초기에 처음으로 직립원인[ 란텐원인( 藍田猿人),북경원인(北京原人)]이 살고 있었던 화석이 발견되었다. 란텐원인은 웨이허강의 남쪽 산시성 란톄현에서 발견 되었으며 중국의 최고 인류로 보고있다.북경원인은 베이징시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되고 20여개의 人骨 과 수많은 석기가 발견되었다.
구석기 후기에도 산시성(山西省)딩춘(丁村)과 광시성(廣西省)마바(馬발)등 에서 호모 사피언스의 화석과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2. 신석기 시대
BC6000경으로 추정되며, 물과 토양이 좋은 황하강유역이 주를 이루고 양자강에서도 터를 잡압다. 석기기술과 움식의 생산과 저장,사회조직이 이루어졌다.
BC5400-5100 ; 북부지방 ; 지역적으로 페이리강 문화(裵李崗文化배이강)- 츠산문화(磁山文化) - 양사오문화(仰韶文化앙소) -룽산(龍山)문화로 이어진다.
페이리강과 츠산문화는 허난성과 허베이성(河北省)남부에 터를잡고 초기농경문화가 시작된시기로 탄화된조와 석기농기구, 개,돼지사육,수렵이 있었다 . 토기는 문양이 없는 붉은색.
BC4500-2400 ; 양사오문화 ; 북부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터를 잡고 있으며 산시성[협서성]의 반포[半坡]유적과 허난성이 먀오디거우 유적이 유명하며 그릇을 구웠던 가마터,묘지,항아리 돌칼등 磨製石器,打製石器가 발견되어 농사를 지었고 집단 생활을 하였다. 토기는 흑회색 삿무늬토기. 남부에서는 저장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한 허무두문화[河姆渡文化]가 대표적이며 탄화된 쌀이 발견,이것은 벼농사를 의미하며 뼈와조개로 만든 연장이 발견되고 토기는 회색에 흑색무늬. 대목조 건축물도 있었다. (BC4300 - 3300).
은, 주 시대 ;
은나라;
BC17세기말경, 북부에 신석기시대 룽산문화를 모체로, 황허강 남안일대를 기점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
태을(太乙)이 명재상 이윤(伊尹)을 임용하여 하(夏)나라를 무너뜨리고 은을 세운후 호에 도읍을 정하였다 [지금의 산동성 차호현].
형제상속과 부자상속이 반복되다가 제10대 중정(中丁)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의 계속되어 도읍을 수차래 옮기면서 점차세력이 약화되다가 BC 13세기에 19대 반경(盤庚)이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확립하기위해 상읍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은조는 다시 왕성해졌다. 22대 무정(武丁)때 전성기를 맞아 산시고원,산둥,안후이지방으로 대정벌을 나갔는데 동남정벌에 몰두하다가 서쪽 산시(俠西)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던 주나라에 의해 은은 멸망하고 만다. 은나라사람들은 자기나라를 상(商)이라고 불렀고 주나라에서는 은(殷)이라고 불렀다. 복사(卜辭)書에보면 은나라 후기에는 선왕을 신성시하였고 거대한왕묘가 있었던 것으
로 보아 왕의 권력이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왕(紂王)을 포악한 군주로 묘사한 설화의 배경도 그러하나 실제로는 우수하고 유능한 왕이 었다 한다.
쉽게 요약하면 신석기시대를 거쳐 황하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시대를 중국의 상고시대라 하고 하나라,은나라,주나라 가 있었다. 이를 보통 삼대(三代)라고하고 전설적인 시대였다. 그런데 1928년 우연히 약제상에의해 은나라을 입증하는 갑골문자가 대량발견되면서 현재로는 은나라를 중국의 최고의 역사적 왕조로 보고있다.
하나라는 전설적인 기록[ 史記( 夏本記)]으로 남아있긴 하나 머지않아 입증 될 것으로 믿는다.
하본기를 보면,하왕조의 시조 우왕(禹王)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였는데 황하강에 홍수가 범랑했을때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를 잘다스려 그 공으로 순(舜)이 죽자 천자로 추대되었으며 우왕은 후임으로 민간인 현자에게 넘기려 하였으나 제후는 우(禹)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여 지금까
지 했던 선양제가 없어지고 상속제 (相續制)에 의한 촤초의 왕조가 탄생하였다. 그런후 마침내는
17대의 이규(履葵). 즉 걸왕(桀王)이 극심한 폭정으로 민심을 잃고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패하고 만다. 은나라는 탕왕이후 29대에 걸쳐 통치를 하다가 은왕조 말기,주왕이 주나라의 문왕과 함깨 이 뒤를 이은 무왕(武王) 에 의해 또한 멸망한다.
은왕조는 약1700m의 토벽으로 둘러쌓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대도시를 이루고 있었으며 종묘와 궁전을 지었다. 제왕이 죽으면 지하 13m에200m''의 넓은 방을 만들어 안치하고 옥기,석기 등 부장품(청동기 최고의 예술품)과 소수의 시녀,시종이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더욱 놀라운사실은 왕에게 순사한 병사들이 한 왕묘에 5백명에서 1천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정치는 점복(占卜)에 의하여 신(神)의뜻으로 받들어 백성들를 통치하는 일종이 종교적원수(元首)였다.
주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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